마리오 보타의 영혼이 담긴 남양성모성지 대성당을 찾았다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마리오 보타와 조각가 줄리아노 반지의 영혼이 담긴 남양성모성지 성모 마리아 대성당을 찾았다. 성지를 가꿔온 이상각 신부의 말대로, 빛과 소리로 가득 찬 공간에서 치유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오전 11시 무렵, 미사가 이미 시작된 후였다. 내비게이션이 도착을 알렸을 때, 내 눈앞엔 남양성모‘성지’라는 이름에서 떠올렸던 광활한 풍경과는 사뭇 다른 경관이 펼쳐졌다. 남양성모성지는 아파트 단지와 상가, 마트 등으로 이뤄진 작은 시가지 안에 자리 잡고 있었고, 여느 성당의 미사 시간처럼 주차장은 차들로 거의 가득 차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쪽 구석을 점령하고 있는 관광버스들이었다. 버스의 유리창에는 각 교구와 성당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서울처럼 비교적 가까운 지역들 그리고 ‘부산교구’ ‘전주교구’ 등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이곳을 찾은 이름들을 보니 ‘성지’의 의미가 조금 새롭게 다가왔다.
아직 건물을 둘러싼 경관은 완성되지 않았다. 조경 공사가 한창이라 건물 전체를 조망하기는 쉽지 않았다. 난삽하게 널브러진 여러 사연들 사이로 우뚝 솟은 40m 규모의 원통형 탑 두 개만 눈에 띌 뿐이었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 한편엔 유리로 만든 초봉헌소가 보였다. 대낮이었음에도 살짝 어둑한 초봉헌소 유리창 너머로 수많은 촛불이 환히 타오르고 있었다. 초봉헌소를 지나고도 걸음을 꽤 옮긴 후에야 대성당의 파사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 앞에서 본 두 개의 탑은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만지는 것만으로 손바닥의 물기가 마를 듯, 매트한 붉은 벽돌과 울퉁불퉁 거친 표면의 흰 벽돌이 촘촘히 쌓인 디테일이 눈에 들어왔다.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두 탑 사이에 위치한 얄팍한 슬릿 창이 햇빛을 반사하며 강렬한 빛을 선사했다. 그 위로 달린 일곱 개의 작은 종이 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마리오 보타와 종교 건축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강남 교보타워와 용산구의 리움 삼성미술관 1관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자. 명확하게 언어로 표현할 순 없지만, 어떤 스타일이 두 구조물을 지배하고 있다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질 것이다. 드라이하고 부드러운 질감의 벽면은 분명하게 드러난 기하학 기호들을 감싼다. 매트한 표면에 부딪히는 빛들은 짧은 난반사를 만들어내며 현실의 공간과 건축물의 존재 사이에 얇은 ‘오라’(aura)를 형성해 이(異)세계의 오브제 같은 감상을 남긴다. 두 건물 모두 현대건축의 거장이라 불리는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 마리오 보타(MarioBotta)의 작품이다. ‘도시와의 조화를 통해 지역성을 담으면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살린 건축물’이란 일반적인 표현은 보타의 세계를 잘 설명하고 있는 듯하면서도 엉성하다. 그의 대표 작품인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현대미술관, 그리스 아테네의 그리스은행 본점 건물 등을 생각해보면 그것만으로는 보타를 설명하기 부족하다. 그의 작품들은 조화를 넘어선다. 성스럽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어쩌면 그가 종교시설 건축에 자주 섭외되는 이유는 그의 건물이 갖는 ‘오라’ 때문일지도 모른다. 남양성모성지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보타가 한국에 설계한 첫 번째 종교시설이지만, 보타는 해외에서 종교 건축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보타가 신자라서인지, 성당이 가장 많다. 프랑스의 에브리, 이탈리아 토리노의 산토 볼토, 베르가모의 요한 23세, 스위스 몬뇨의 산 지오반니 바리스타, 스위스 타마로 산타마리아 엘리 성당 등이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천주교 성당만 지은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심발리스타 유대교 회당이나 중국의 나자후 모스크 사원 역시 보타의 작품이다. 이처럼 다양한 종교 건축물을 모두 설계해본 건축가는 몇 안 되는 터라, 그는 종교 간 차이를 뛰어넘는 건축으로도 주목받았다.
처음 보타가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에 성당을 짓는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약 12년 전이다. 2011년 말, 천주교 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의 이상각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이하 이상각 신부)가 이를 발표하면서다. 세계적인 건축가가 아직 개발 전인 화성시 남양읍에 건물을 짓는다는 이야기는 큰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보타를 비롯해 ‘20세기의 미켈란젤로’라 불리는 조형예술가 줄리아노 반지(Giuliano Vangi)와 보타와 함께 자주 거론되는 건축가 페터 춤토어(PeterZumthor) 등이 남양 성지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한만원, 이동준, 승효상, 정영선 등 한국 건축과 조경계의 어르신들도 함께 한다는 소식에 천주교 신자나 건축 덕후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마음 역시 꽤나 들떴더랬다. 그리고 이제 남양성모성지에 지어진 남양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서 반지의 예수상과 성화가 미사 때마다 신도들을 맞이하고 있다. 본당이 미사 때마다 가득 차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30년의 프로젝트
보타의 설계, 반지의 조각과 성화 등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남양성모성지 성모 마리아 대성당 봉헌 계획을 처음 시작하고 이끌고 온 주역은 이상각 신부다. 남양성모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이름 없는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순교지다. 조선 8대 교구장이던 뮈텔 주교가 간행한 〈치명일기(致命日記)〉에 기록된 순교자의 이름은 4인에 불과했으나, 이름 없이 죽어간 더 많은 신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름없는 이들과 함께 잊혔던 남양 순교지는 1983년 들어서야 순교 성지로의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다. 이상각 신부는 1989년 성역화 사업을 이어받았고, 성지는 1991년 10월 7일 한국 천주교 최초로 성모 마리아에 봉헌되며 성모 마리아 성지로 선포됐다.
이상각 신부의 프로젝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원래 논밖에 없는 허허벌판이었어요. 인프라가 없는 지역이었죠.” 성지가 된 덕에 매년 많은 순례자가 방문했으나, 비라도 오면 갈 곳이 없을 정도로 성지에는 마땅한 시설이 없었다. 성지로 선포된 지 20주년을 맞이한 2011년, 이상각 신부는 대성당을 봉헌할 계획을 세웠다. “저는 새로 지을 성당이 따뜻한 위로와 치유를 건네는 공간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현대인 대부분이 그렇듯, 성지에는 상처 입고 위로가 필요한 분들이많이 오시거든요.” 그에겐 건축의 본질적인 요소, 즉 빛과 소리, 공간 구성을 잘 이룬 건축물을 설계할 수 있는 건축가가 필요했다. 빛의 건축가인 보타보다 이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할 건축가는 없었다. 장기간의 프로젝트를 이끌어온 만큼, 이상각 신부 역시 좋은 건축을 위한 공부를 꾸준히 해왔다. 중간중간 직접 ‘건축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1995년에는 르코르뷔지에 건축 기행을 떠나 보타의 건축물을 봤고, 1998년에는 춤토어의 발스 온천장을 방문했다. 그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들의 건축물을 직접 보고 큰 감동을 받았죠. 이들과 함께 작업 한다면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특별한 선물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보타와 춤토어의 명성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고 전했다.“ 그들은 종교 건축의 본질적 요소, 빛과 공간, 소리에 절묘하게 현대의 옷을 입혀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이상각 신부의 열정에 보타와 춤토어가 응한 것은 그야말로 축복이다. 순교지에 성당을 짓겠다는 그의 뜻에 공감한 두 건축가는 최소 수준의 보수를 받아들였다. 비용은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성금과 대출로 충당했다. 거장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무엇이었을까. “당신이 천국에 갈 때, 나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보타가 이상각 신부에게 한 말이다. 이 신부는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이 프로젝트에 응한 이유가 이 말 안에 담겨 있다고 했다. “물질적인 것을 넘어 인간의 영적인 요구에 부응하는 건물을 짓고 싶습니다.” 남양성모성지 대성당 프로젝트 설계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마리오 보타: 영혼을 위한 건축〉에서 보타는 이렇게 말한다.
보타의 빛
미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1300석 규모의 본당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탑의 상부에 위치한 반원형 천창과 탑의 가운데 붙은 슬릿 창을 통해 성당 안으로 엄청난 광량의 빛이 은은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아주 흐린 날이 아니라면 낮 시간에는 본당 안에서 따로 조명을 켤 필요가 없다. 제단을 비추는 천창의 빛과 더불어 대성당 지붕의 골격을 이루는 트러스 구조 사이에 위치한 천창에서도 햇빛이 그대로 쏟아져 내리기 때문이다. 실내로 들어온 빛들은 ‘보타 스타일’로 꼽히는 주재료인 붉은 벽돌에 부딪히며 공간 전체를 영적인 온기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천창 위로 쏟아진 직사광선은 천창에 붙은 직사각형 패턴과 어우러져 본당 내부 곡면에 하나의 조형 회화를 그려냈다. 제단과 성화 위를 감싸듯 빛과 그림자의 날개가 펼쳐졌다.
“1년에 한 번, 하지의 정오가 되면 빛이 탑의 정중앙에 떨어집니다. 이때는 빛의 날개가 제단과 정확한 대칭을 이루죠. 아직은 6월 초라 약간 비대칭이네요.” 미사를 마친 뒤 이상각 신부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내부를 구경하는 신자들과 함께 성당 구석구석을 다니며 직접설명에 나섰다. 빛의 방향과 계절감까지 고려해 건축한 것이냐는 질문이 들어오자, 이 신부는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보타의 건축물을 완성하는건 천장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에요. 빛은 그가 사용하는 대표적인 건축 재료 중 하나입니다. 이 모든 게 그의 계산 아래 만들어진 것이죠.”
제단 한 가운데 걸린 십자가상과 그 양옆을 지키고 있는 성화는 반지의 작품이다. 거대한 십자가상의 예수는 여타 성당에서 볼 수 있는 모습과 조금 달랐다. 일반적인 성당에 걸린 십자가상의 예수가 눈을 감고 있는 것과 달리, 반지의 예수는 눈을 뜨고 더욱 생동감 있는 표정을 짓고 있다. 섬세하게 다듬은 덕분에 실제 머리카락이나 수염이 흩날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래에 위치한 성화는 성경 속 유명한 주제인 ‘최후의 만찬’ ‘주님 탄생 예고’ ‘엘리사벳 방문’을 각각 표현한 모양이었는데, 유리로 장식하는 점을 고려해 뒷모습까지 그려져 있었다. 재미있는건, 여기에 다소 현대적이고 지역적인 변주가 있다는 점이다. ‘최후의 만찬’ 속 인물들은 현대인의 옷차림에 몇몇은 동양인의 얼굴을 하고 있고, ‘주님 탄생 예고’와 ‘엘리사벳 방문’의 여인들은 한복을 입고 있다.
제단 바로 앞에 놓인 신자석 한 자리는 일반적인 성당에 놓인 것과 같이 나무로 된 의자였지만, 그 밖의 좌석은 전부 임시로 쓰이는 플라스틱 의자였다. “지금 의자는 이탈리아에서 제조 중이에요. 이 의자와 같은 모양의 의자가 들어올 예정이죠. 재료는 너도밤나무예요. 건축재로도, 가구재로도 우수한 나무랍니다.” 이상각 신부의 설명에서 애정이 가득 느껴졌다.
그는 성당의 음향 설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초기부터 종교 공간인 동시에, 문화공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획했거든요. 성당의 기본적인 목표에 부합하면서 동시에 음악을 담는 공간을 설계하려 했죠.” 이를 위해 여러 전문가가 협업을 했고, 결국 미사뿐만 아니라 심포니 연주와 앙상블, 성악 등 여러 장르의 공연이 가능한 홀이 생성됐다. 실제 한국에서 클래식 음악을 담을 수 있는 대성당을 기획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의 설명이 이어지는 중간중간, 신자들의 안수 기도 요청이 이어졌다. 이상각 신부는 잠시 설명을 멈추고 흔쾌히 이들을 축복했다.
건축의 치유
보타가 남양성모성지 대성당을 짓기로 계약했을 때, 완공은 2017년 무렵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보타는 8여 년간 한국과 스위스를 오가며 12차례나 설계를 수정했고, 2017년에야 착공에 들어갔다. 이른바 ‘보타 스타일’은 빛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삼각형, 사각형, 원형과같은 매우 기본적인 기하학 형태는 원시 시대부터 이어진 건축 언어의 현대적 표현이며, 붉은 벽돌과 같은토착 재료들의 사용은 생태 건축 한 축이면서 일관된 미적 성향을 표현하는 현명한 방법이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지속 가능한 건축’을 위해 에너지 절약 방안을 고려한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적극적인 자연 환기를 활용해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한 것이다. 보타가 선택한 주재료인 콘크리트와 벽돌의 축열 성분 역시 에너지 효율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았다. 춤토어가 설계한 건물, ‘티 채플’이 아직 착공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티 채플은 춤토어가 아시아에 짓는 첫 번째 건축물이 될 예정이었다. “춤토어는 티 채플이 들어설 땅을 고르는 것부터 건물의 역할, 그곳에서 벌어질 의식까지 하나하나 생각하며 공간을 제안했습니다. ‘모든 인간이 환대받을 수 있는 공간, 동양의 오랜 문화인 차를 끓여 마시는 공간이라면 진행하겠다’고 했기에 준비하게 된 건물이었죠.” 이상각 신부의 말이다. 종교적 체험이 종교 공간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고 본 춤토어의 과감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종교 건물이 아니라 신자들의 돈을 쓸 수 없다 보니 실현이 어려워졌다. 춤토어 역시 티 채플의 아이디어가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으나, 중요한 건 역시 비용이다.
티 채플의 아쉬움을 제외한다면, ‘위로와 치유의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이상각 신부의 바람은 거의 이뤄졌다. 보타의 스타일대로 빛과 소리로 충만한 공간이 형성됐고, 반지의 예수상과 성화는 대성당에 걸려 신자들을 맞이하고 있으며, 성지 전반의 조경 작업도 차질 없이 진행 중이다. “르코르뷔지에는 ‘건축은 인간의 마음을 울려 사람들의 일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어요. 그의 말대로, 건축물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간을 배려하는 일이겠지요.” 이상각 신부의 말이다. “불특정 다수의 신자, 지역 주민, 또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이 공간에서 사람들이 위로와 치유, 감동을 받길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종교 공간이 줄 수 있는 최선의 미덕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