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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Talk

사람이 싫어질 때. 우리는 어떤 걸 할 수 있을까?

엘르코리아 (ELL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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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지금의 마음은 일시적인 걸지도 모른다. 관계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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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 때문에 현타 온다” “대인관계 다 부질없음” “혼자가 더 편해요” “손절이 답”….

관계란 무엇일까?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에 떠도는 대인관계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언젠가부터 단절을 권하는 쪽으로 귀결되는 걸 본다. 나도 안다. 나 혼자의 감정만 돌보는 게 얼마나 가뿐하고 산뜻한지. 친구들 모임에서 누군가 소외감을 느낄까 노심초사하거나, 연인과 연락 빈도 같은 시시한 일로 다툴 때, 경조사 참석이나 비용 부담을 두고 가족과 언성이 높아지거나, 일터에서 누군가의 자잘한 무례함을 겪을 때면 타인을 위해 내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 이토록 많은 현실이 불합리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프랑스 출신의 심리학자 마리옹 블리크는 〈나는 독이 되는 관계를 끝내기로 했다〉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관계 맺기보다 더 어려운 건 없다. 우리는 자신이 되려고 하는 동시에 지속해서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는 곡예사와 같다”
라고. 그렇다. 인간관계는 어렵다. 그리고 관계에서 발생한 문제의 대부분은 빌런 한 명을 제거하며 끝나는 ‘사이다 결말’이나 관계에서 ‘로그아웃’하는 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관계의 추가 명백하게 기울어져 있거나 내게 해악만 끼치는 관계가 아니라면 인간관계는 나와 상대뿐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도 복잡다단하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30대 초반만 해도 나는 친구든 지인이든 상대에게 깊게 실망하면 연인과 이별하듯 절교를 선언하는 쪽이었다. 그리고 내가 떠나온 그 자리를 돌아보면 나로 인해 다른 이들까지 덩달아 구멍이 ‘뻥’ 뚫려버린 기억과 추억이 잿더미처럼 남아 있다. 가까운 친구 A는 10년 가까이 잘 만나고 있던 모임에 회의감을 드러냈다. “별 의미 없는 이야기만 오가는 것처럼 느껴져. 다음에 만나도 또 비슷하겠지 싶고.” 평소 특별한 문제가 없는데도 알고 지냈던 이들과 만나는 걸 그만두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럼 A는 왜 이런 마음을 갖게 된 걸까? 후회하지는 않을까? 어쩌면 지금 우리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보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관계에서 빠져나와도 된다는 사회적 신호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것 아닐까? 과연 이런 심리상태는 건강한 건지, 잔뜩 부푼 궁금증과 자기반성을 안고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의원의 문을 두드렸다.

이진복 · 양채영 원장은 건강한 관계의 필요성에 동감한다. 관계는 당연히 갈등을 수반하지만, 합의점을 찾고 서로 의견을 맞춰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성장하기 때문이다. 앞서 관계 유지의 어려움을 곡예에 비교한 마리옹 블리크 역시 같은 책에서 ‘관계를 통해 타인과 접촉함으로써 인간이 가장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음’ 또한 명시한 바 있다. 그럼에도 왜 이토록 많은 사람이 인간관계를 둘러싼 회의감과 피로감을 호소하는지 묻는 내 질문에 이진복 원장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대부분의 현대인이 학업 또는 직장에 치중해야 하는 지금,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요소가 너무 많아요. 누군가를 만나 시간을 보내며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나 에너지가 서로 없죠. 그렇다 보니 혈연으로 얽힌 가족, 애정으로 엮인 부부나 연인이 아닌 관계들은 순위에서 자꾸 밀릴 수밖에요.” 양채영 원장이 덧붙인다.
“사회생활을 하며 생겨나는 관계는 방어적이 될 수밖에 없는 면이 있다고 봐요. 내 특정한 상태를 노출하는 것이 약점이 되는 세상이기도 하니까요. 만약에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 대인관계에 회의감을 느낀다면 지금 내가 우울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고립되기를 택하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울증의 중요한 진단 기준 중 하나가 모든 일에 흥미가 저하되는 것이거든요.”
양채영 원장이 지적한 것처럼 우울증과 대인관계 기피는 상호적 측면이 있다. 우울로 인한 무기력함 때문에 관계 맺기에 소홀해지고, 이로 인한 고립감이 우울함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외로움이 하루에 담배를 15개비 피우는 것과 맞먹을 정도로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사회가 관계에 회의적이 될수록 우정은 가장 뒤로 밀려나는 가치다.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미국의 싱크탱크 ‘브루킹스(Brookings)’ 소속인 리처드 리브스는 한 강연에서 ‘우정의 쇠락(The Decline of Friendship)’에 대해 다룬 바 있다. 유튜브 조회 수 300만 뷰를 훌쩍 넘긴 이 영상은 우정이 설 자리를 잃는 원인으로 개인의 업무 부담과 역할이 늘어난 사회 변화를 꼽는다. 부모가 자녀 한 명에게 쏟게 되는 시간이 예전에 비해 절대적으로 길어진 것, 태어난 곳을 떠나 대도시나 해외에서 살게 되는 경우가 많아진 것, 이혼율이 높아지며 커플일 때 맺었던 관계를 통째로 잃게 되는 것 등도 원인이다. ‘곤란에 처했을 때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는 질문에 1990년대 미국 젊은 남성의 45%가 ‘친구’라고 답했다. 반면 지금은 무려 36%가 ‘부모’라고 답한다. 사뭇 충격적인 결과다. 리처드 리브스가 정의하는 우정은 ‘순수하고 놀랍도록 평등한 관계’다. 가족을 포함한 대다수의 인간관계가 이 관계에서 ‘업무적인(Transactional)’ 측면이 있는 반면 우정에는 명확한 대가나 의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의 심리 전문가 이름트라우트 타르 또한 〈그럴수록 우리에겐 친구가 필요하다〉에서 우정의 특수성을 짚는다.
“이 시대에서 위로는 구하기 힘든 희귀품으로 변해버렸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려울 때 서로 돕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곳이 아니다. 위로와 지지를 받기 위해 사람들은 친구 대신 전문가를 찾아야 하고, 일상적인 위로가 그리워 돈을 지불하며 상담을 받기도 한다.”
이름트라우트의 말이다.

갑자기 왜 우정 타령이냐고? 그러나 핏줄이나 서류상의 의무로 얽히지 않았음에도 배려와 전적인 지지, 위로라는 감정을 요구하는 거의 유일한 관계인 우정의 몰락은 그 자체로 관계의 몰락을 의미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1인 가구 비중이 어느 때보다 높고, 의지할 형제나 친족 수는 급감했으며, 혼인율은 낮아지고 이혼율은 높아진 가운데 기대 수명은 잔뜩 늘어난 지금 시대야말로 우정이나 친밀감으로 맺어진 순수한 관계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는 점이다. 지금 상대적으로 무의미하게 느껴지거나 삶이 벅차다고 해서 관계의 끈을 놓는 것은 장기적 시점에서 봤을 때 결코 현명한 선택이 아닌 것.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는 줄어들고, 편견이 강화되며,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나날이 어려워질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사회적 교류는 우리의 삶을 정서적으로 풍요롭게 만들어줄 뿐 아니라 실제로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피로감이 엄습한다면 양채영 원장의 다음 말이 희망이 돼줄 것이다.
“특정한 시기를 지나고 나면 관계 회복에 대한 탄성이 생기기도 해요. 대인관계에 회의감을 느낀다면 그 회의감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돌아보세요. 이때의 회의감이 사람에 대한 환멸로 이어지지 않도록 그렇지 않은 관계를 만드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직장관계 때문에 힘들다면 긍정적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취미 모임에 나가거나, 가족 때문에 힘들다면 다른 관계를 통해 충족감을 얻는 거죠.”

우연의 일치인지 아주 오랜만에 중 · 고등학교 친구들의 단톡방이 울렸다. 나를 제외한 친구들은 모두 결혼을 했고, 아이들 나이가 비슷한 B와 C는 가족끼리 자주 어울린다는 것을 알았기에 모임에 나가는 마음이 약간 의기소침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기꺼이 마음을 열고 바라본 친구들의 얼굴은 10대 때 내가 알았던 얼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는 시간이 선사하는 친밀감의 힘은 생각보다 컸다! 그러니 사람에게 지쳤다면 우선은 내 상태를 돌아보길. 사람이 아닌 다른 것 때문에 내가 지친 건 아닌지, 관계의 한계를 정의하고 편견으로 마음을 닫은 것은 내 쪽이 아닌지. 오래된 관계에서 새로운 것이 보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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